위로공단, 2014
출처 - 다음 영화
그녀들의 눈은 가려져 있다. 서로의 손에 의지해 숲 속을 헤쳐나가도, 그 모습조차 너무 위태로워 보여 마치 유령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환상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도심 한 복판엔 ‘수출의 다리’ 양 옆으로 고층 빌딩이 죽 늘어서 있다. 분명 한국은 눈부신 산업화를 거쳐 부국의 반열에 발을 들이 밀었다. 성장 신화의 미담. 하지만 산업의 최전선에서 직접 그 손으로 가발을 만들고, 유명 브랜드의 옷을 만들고, 선박을 만들고, 반도체를 만들어 수출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나 산업화니 민주화니 치고 받을 때조차 그들은 은폐되어있었다. ‘수출의 다리’라고 새겨진 판을 정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화면은 실제로 그 다리를 이어왔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상기시키는 듯 하다. 예나 지금이나 소외된 노동계층. 그리고 그보다도 더 소외되었던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이 카메라의 시선 너머로부터 전해져 온다.
슬픔과 분노에 눈물이 차오르다가도 돌연 너무도 무서워진다. 인간의 추악하고 무서운 모습들이 그녀들의 삶과 노동 이곳 저곳을 옥죄고 있어서. 계급의 문제는 여성‘노동자’가 ‘여성’노동자로, 나아가 여’성’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했다. 비록 박봉에 열악한 노동조건이더라도, 정해진 일을 하고 상응하는 임금을 받기로 계약된 노동자였던 그녀들은 수시로 중간 관리자 혹 그 위의 사용자들로부터의 성폭력 위험에 놓여지게 되었다. 전혀 계약서에 명시되어있지 않은. 이는 현재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는 항공노동자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들은 마치 “난 돈을 지불하고 너의 모든 것을 산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돈으로 모든 가치를 환산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세태는 이 땅에 굳게 뿌리내린 성별적 계급의식과 결탁해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한다. 먼지 자욱한 생산라인에서 보낸 청춘이 맺은 열매가, 폐병으로 망가져 붉게 짓이겨진 채로 땅에 뿌리쳐졌을 때 그녀들이 택한 마지막 일자리는 성노동이었다는 사실 또한 사회의 이런 사고방식과 연관이 있을까? 공장에서 쫓겨나 '창녀가 된 언니'들을 가끔 길에서 마주쳤을 때, "너는 병 걸려서 나처럼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하는 건 개인의 비극을 넘어 시대의 폭력으로 느껴진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것을 내면화한 우리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다 치부하고 다소간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외면하는 새에 그 ‘다소간’의 격차에 많은 이들이 질식해왔고, 이제는 우리까지 질식해가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을은 갑이 되어 내면화한 권력과 착취를 재생산한다. 또 다른 어딘가의 노동자일 사람이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던지는 모습에서. 캄보디아의 노동자나 이주 노동자에게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는 우리의 모습에서 부조리한 현실은 잉태되고 되풀이된다.
시청 앞에 서서,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해 부당한 현실을 호소하는 그녀의 손은 떨고 있었다. 우리의 어머니 중 한명일 그녀는 그때, 투쟁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조끼를 겉옷 위에 걸치고 사람들 앞에 섰다. 노동하며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여성노동자에게 세상은 어떤 이름표를 달아주는가? 언론을 통해서라면, 멀리서 보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텐데 가까이서 본 그녀의 마이크 잡은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며칠 전 기사를 하나 보았다. 조선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호루라기로 많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본인은 끝내 탈출하지 못해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선 그녀를 ‘의인’이라고 했다.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는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이에 비공감하고 비난하는 댓글도 많았다. 여기서까지 이래야 되냐면서. 궁금하다. 만약 그녀가 호루라기 소리가 아닌, 강명자씨처럼, 김진숙씨처럼, 김소연씨처럼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면 어땠을지. 그때에도 그녀는 ‘의인’일까?
그래서일까. 그녀들이 서로를 등에 업고, 다리를 건너서, 계속해서 나아가지만, 그 실루엣이 못내 슬퍼 보인다. 그래도 그 따뜻함에서, 서로 맞댄 작은 힘에서 희망을 보아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