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군대란 어떤 의미일까? 기본적으로 군대는 병역 의무에 의거, 대부분의 남성이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흔히들 얘기하는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와야지”란 말은 단순히 국민으로서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 말은, 한 사람의 남성 주체가 되기 위해선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즉 군대는 단순히 법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사나이’로 완성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관문이라고 인식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남성상은 군대를 다녀온 남자의 모습, 구체적으로는 군대가 요구하고 만들어내는 남성상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의 가장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남성성을 만드는데 군대가 많은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군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형성한다.
헤게모니란 직접적인 통제를 통한 지배가 아닌 피지배자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지배로서, 지배적 가치관이 피지배자의 생활 속에 습관과 같이 자리 잡아 있는 형태를 말한다. 헤게모니는 지배 계급의 논리가 피지배 계급의 삶과 사회 전반에 상식처럼 녹아 들어 있게 하는 수단이 되어, 지배 논리에 대한 다수의 저항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 한 사회의 지배적인 남성성이요, 동시에 구성원들에게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받아들여지고 재생산되는 남성성인 것이다. 그렇기에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남성이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사회•문화적 특권과 부조리를 은폐하게 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거기에 대응하며 변화한다. 정치적인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형성되는 과정이란 규범의 정치로서, 특정한 남성성이 보편적·지배적 규범으로 제도화 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지배적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는 남성성은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남성들을 주변화한다.
우리 사회에서 군대는 여러 면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연관 되어 있다. 남성이 병역 의무를 지게 되므로 군대는 ‘남자라면 누구나 갔다 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 우선 병역의무를 이행 했는지의 여부도 남성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군대는 보편적 남자의 모습을 규정하고 권력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군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내용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보편적·지배적 남성성의 주체를 재생산해서(매년 입대하고 제대하는 수많은 남성을 보라) 그 위치를 공고히 한다. 복무기간 동안 철저히 계급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훈육 받으며, 한 개인은 군대의 여러 가치를 내면화 하고 재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진짜 남자’가 되어 사회로 복귀하는 개인은 그동안 내면화한 가치를 자연스럽게 사회에서도 생산하고 소비한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라는 인식이 군대 뿐 아니라, 군대 밖의 사회에도 파다한 것이 바로 그런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군내 문화, 병역•군대에 대한 인식 등 군대와 관련된 총체적인 ‘군대 문화’는 남성 사회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회사 내의 조직문화는 군대의 조직문화를 많이 닮아 있으며, 초, 중, 고등학교의 교육 현장에서도 군대 문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군대의 ‘훈련 주의’는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학생들의 체력단련부터 시작해서, 정신 개조를 위한 극기훈련, 단합 대회는 학교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많이 하고 있다.
‘군대 문화’는 개인의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끼쳐, 단순히 군대를 경험한 남자 뿐 아니라, 군대 문화가 전파된 사회 일반의 다른 구성원도 그런 행동양식을 지니게 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끊임 없는 주변화를 통해 특정 집단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사회의 권력 관계를 형성한다. 사회 전체에서 작용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주변화하는 대상은 단순히 남성에서 모든 사회구성원으로 확장된다. 특히 남성성이 다른 가치에 비해 지배적으로 군림하는 양상이 도드라지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볼 때,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서의 군대문화에 부합하는 사람만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력을 갖게 된다. 혹자는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소위 ‘여성 상위 시대’, 혹은 ‘여풍 현상’ 등을 예로 들며 이를 부정할지 모르나, 한 꺼풀 만 벗겨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금의 현실에서 여성이 조직 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남성성이 전제된 조직문화를 내면화하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다른 생물학적 남성들을 압도해야 한다. ‘알파 걸’은 ‘여성이어서’라기 보다는 ‘여성인데도’ 남성들의 세계에서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구성원의 내적 동의를 얻어 당연한 모습인 양 인식이 되며, 남성성의 작용에 의한 지배와 특권의 구조가 은폐되어 있어 인식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군대 문화가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서 기능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그 영향력이 크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문화나 행동양식이 어디에서 기인했으며 그것이 왜 상식적인지 의문을 품어봐야 마땅하다.
덧 – 2012년에 썼던 글을 지금 올린다. 그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군대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이 변화해 온 것 같아서, 지금 읽어보니 현재 실정에 맞지 않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군대와 남성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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